서기 661년( 문무왕 원년) 봄, 날이 따듯해 지면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도 봄기운이 완연해 졌다. 길거리에는 꽃들이 활짝 피어 나고 사람들은 기와집이 즐비한 골목을 활기차게 돌아다닌다.
이제 원효의 나이 올해로 45세, 출가한지도 35년 이 넘었다. 원효는 봄이 깊어갈수록 마음이 급해진다. 11년전인 34세 때 (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었다. 가는 도중에 요동에서 고구려 수비군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고 겨우 탈출해 나왔던 기억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경주로 돌아온 원효는 그동안 열심히 불경을 읽고 경전속에서 진리를 찿으려는 구도심은 더욱 커졌다. 오직 수행 정진에 전념했으나 그는 자기의 공부에 만족할 수 없었다. 원효는 더 많은 경전을 구할 수 있고 삼장 현장법사 등 큰 스승이 많은 중국유학을 재 시도한다. 이번에도 의상과 함께 가기로 한다. 의상은 원효 보다 8살이 어리지만 성골 출신이다. 성골은 기회만 되면 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이다. 원효는 육두품 출신이다. 육두품은 진골 바로 아래 신분인데 둘 다 모두 신라의 중앙귀족 계급이다.
그러나 그들 둘은 신분의 차이가 문제 될게 없었다. 속세를 벗어난 그들은 오직 당시 귀족계급들의 전유물이었던 불교를 일반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고 극락왕생 할 수 있는 불교의 대중화를 전파하는게 그들의 공동 목표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의상은 행장을 꾸리고 11년 전 실패를 교훈 삼아 이번엔 바닷길을 택한다. 당시 경주에서 중국을 가는 여행로는 당성 (현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부근에 있는 당은포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가로 질러 가는게 지름길이다.
당성은 원래 한강 백제의 토성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를 거쳐 1천년 이상 번창했던 한반도 최대의 대당 무역항이었다. 이른바 '당은포로' 라고 하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상인들, 유학생들과 사신들이 이 길을 통해 당나라를 오고 가던 무역과 외교의 통로이기도 했다. 그들에겐 다행스럽게 당성은 당시 신라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 삼국시대 대당 교역관문 항구 '당은포' 해상로 ]
그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당은포에 도착해야 했을 것이다. 겨울이 되면 바다가 사나워져 배가 며칠씩 묶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당성까지는 어림잡아 천오백리길이다. 수도승들인지라 말을 타기보다는 대부분 걸었을 것이다. 길을 재촉하다보면 노숙이 다반사다.
당나라로 가기 위한 당시의 교통로를 여러 학자들이 비정한 내용을 정리하고 여기에 더하여 화성지역학 연구소(소장 정찬모)에서 연구한 '화성지역의 신라시대 주요 교통로'에서는 원효와 의상의 여로를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은 일단 경주에서 선산을 거쳐 상주에 도착했다. 상주까지 온 그들은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계립령 (경북 문경- 충북 수안보 사이에 있는 고개)을 넘어서 보은과 진천을 지나고 죽주산성(안성)을 거쳐 화성시 동탄과 병점을 통과해 남양 무송리로 접어 들었다. 무송리에서 성목재 (화성시 마도면 청원초교 앞)를 지나 금당리에서 이곳 백곡리 여치산에 도착했다.
[추정 경로/ 해문리(마도 청원초교 앞) - 백곡리(여치산)- 당성]
화성시 백곡리 여치산에서는 지난 '71년 주민의 신고로 백제 고분군이 처음 발견 되어 '93년 까지 총 12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 백제시대 고분의 형식 (석곽묘 형식)과 백제토기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출토 되었다. 봉토 크기가 지름 10m 내외의 타원형으로 되어 있는 그 고분들은 보통 산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어 큰 비라도 오면 쉽게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한쪽면이 무너져 내리면 토굴이 생기게 된다.
[발굴당시 모습 /'93년 9월 .사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밤이 되자 칠흑 같은 어둠이 산속에 내려 앉았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내일 당성에 도착하는 수 밖에 없다.
오랜 기간 여독에 지치고 이젠 목적지가 바로 앞에 있으니 원효는 바로 깊은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을까 원효는 갈증을 느꼈는지 잠에서 깼다. 어두운 토굴에서 허연 물바가지 같은 것이 보였다.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이 오고 햇빛이 토굴 안을 환하게 밝힌다. 자세히 보니 토굴은 무덤이었고 사람의 해골이 보인다. 어젯밤에 그 속의 물을 마신 바로 그 물체다.
원효는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무덤 밖으로 뛰어나가 구역질을 하면서 바로 그 때 깨닫게 된다. " 아, 일체가 모두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구나" 하는 '일체유심소조' (一切唯心所造)의 이치를 깨달았다. 물도 지난밤의 그 물이고 그릇도 그 그릇인데 지난밤에는 그렇게도 시원하고 맛있게 마셨던 물을 오늘 아침에는 구역질 하며 뱉어내려 하는것이 물에 문제가 있고 해골바가지에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만드는 것임을 알게된 것이다.
원효는 고민 하기 시작한다. 모든것이 다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줄을 알았으니까 구도를 위해 굳이 중국에 갈 이유도 인도에 갈 이유도 없는것이 아닌가 하는 혼란스런 생각이 들었다.
원효는 당성에 도착해서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나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는 의상에게 원효는 결국 말한다. "나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포기한 이유와 저간의 상황을 의상에게 얘기한다. 원효와 의상 둘 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며칠 후 의상은 원효와 떨어져 당은포를 출발해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탓다. 그 때 원효는 염불산(현재지명: 봉화산 /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에 올라 의상이 타고 가는 배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서해바다에 떨어지는 초여름날의 석양은 그 날 유난히 붉었다.
원효는 "나무아미 타불 ,나무아미 타불~" 을 염불 한다.
[[ 원효가 득도한 장소는 왜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 인가 ? ]]
- 화성지역학 연구소(소장 정찬모)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 하고 있다.
[1.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 중 본국해문당주계(本國海門唐州界) = 현재 당성(唐城) 부근 ]
당나라에 도착한 의상은 화엄종을 연구하고 671년에 신라로 돌아와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송나라 승려 찬녕이 쓴 송고승전 중 [의상전] 기록에 의하면 원효의 오도처가 본국해문당주계 (本國海門唐州界 )라고 쓰여 있다. 송고승전은 당나라 시대부터 송나라에 걸쳐 630년부터 980년까지 350년간의 고승 533명의 전기와 130인의 부전의 기록이 담긴 책이다.
그동안 본국해문당주계가 어딘가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 당주(唐州 )가 오늘날 경기도 화성의 당성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은 학계 대다수의 의견이다. 찬녕은 송고승전에서 의상과 원효가 당주지역에 도착해 당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 보고자했다는 의미로 적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해문리(海門里)'는 현재 까지 존속하고 있는 전체 지명 중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화성시의 행정 지명이다. 해문리는 백곡 백제고분군이 있는 산을 뒤로 끼고 있는 마을이므로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볼 수 있다.
[2.제천 월광사 월랑선사 탑비비문 에 새겨져 있는 직산이라는 지명= 입피골, 백곡리 ]
직산에 이르러 ....(4자 결락)에 거처 하였는데 이곳은 신승 원효대사가 도를 깨치신 곳이었다.
직산(稷山)의 직(稷)은 당성과 백곡리 고분이 있는 백곡리 690 일대를 '입피골' 이라 부른다. 순 우리말의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직으로 썻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직산의 산(山)은 인근에 위치한 '검산'과 '청명산'에서 따온것으로 보인다는 해석이다.
천안의 직산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직산 지명은 원랑선사 탑비가 기록된 시기(890년) 보다 50년이나 지난 시기에 개칭(940년)했기 때문에 상호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3.서산 보원사법인국사 탄문 비문에 있는 '향성산' 지명 =향기실 마을 ]
[서산 보원사 법인국사 탄문 비문]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향성산 안에 절터가 있는데 옛날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함께 머무르며 쉬던 곳이라고 한다. 향성산은 화성시 마도( 도를 갈고 닦는다는 뜻)면 백곡리의 향기실 마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지명에서 '지'나 '기'가 성(城)과 대응하고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이유다.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인 오도처가 어디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으나 역사적인 문헌과 비문에 오도처를 기록한 지명으로 해문. 당주계 . 입피골. 향기실이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라는 화성지역학 연구소의 추정은 비교적 합리적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시대 대형 고분의 존재와 부근에 백사가 있었으며 여러 지명이 기록과 일치하는것으로 보아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장소는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백제고분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특히 고영섭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는 '18년 학술발표회에서 원효스님의 구법행로를 주목하며 화성 당성 부근을 오도처로 비정했다. 고 교수는 " 당시 남양만 당은포의 관할지가 당성이었고 당성이 현재 경기도 화성에 있으며 중부횡단항로로 나가는 출발지점이 남양만 당은포라는 점을 고려하면 원효의 오도처는 당항성 인근 어느 무덤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라고 강조했다.
Eco-Times 박래양 기자lypark97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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