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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웅명의 문화기행 /몽골 단상(7)] - 지구촌의 몽골리안 -

Eco-Times | 기사입력 2023/07/24 [07:45]

[금웅명의 문화기행 /몽골 단상(7)] - 지구촌의 몽골리안 -

Eco-Times | 입력 : 2023/07/24 [07:45]

 

 

 

▲ 한여름 울란바타르 앙카라 거리의 활기찬 시민들

 

8월 초, 흐리고 비가 오는 날씨이고 기온은 섭씨 8도에서 20도를 오르내린다. 감기 기운이 들어 그저께부터 감기약을 먹고 있다. 콧물도 나오고 목도 칼칼하다. 몽골 도착 신고식을 하나 보다.

 

이흐 델구르(국영 백화점, Ihx Delgur ; ‘큰 상점’이란 뜻) 건너편 피스 애비뉴(Peace Avenue)에 있는 한 방크(은행, Xaan Bank)에 들러 한국에서 제대로 달러가 송금됐는지 확인한다.

 

며칠 전 코이카 임 부소장이 서울로 가는 길에, 내가 갖고 왔던 여행자 수표(TC, Travelers Check)를 아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 바 있다. 아들이 다시 그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어 달러로 송금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웬만한 나라에서는 여행자 수표가 통용됐는데, 이곳 은행에서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발행의 수표를 취급하지 않고 있다. 몽골은 아직 국제적으로 신용거래가 되지 않는다는 건가. 현금, 캐쉬(cash) 만을 좋아한다는 건가. 이들 국제금융정책의 기조가 궁금하다.

 

울란바타르 도착 20일 만에 돈은 무사히 도착했다. 어떤 때는 중국 상하이의 어느 은행인데, 여행자 수표로 돈을 찾게 해주겠다며 보이스 피싱 성 전화가 오기도 했다. 어떻게 내 정보(전화번호와 현안)가 새어 나갔다는 건가. 아마 시내 은행들에 문의하는 가운데 정보가 새어 나간 듯하다.

 

이 번거로운 절차도 신고식인가. 나는 은행에서 400 달러를 찾았다. 처음 찾는 돈에 약간의 수수료가 붙었다. 이흐 델구르 1층 환전 코너로 와 달러를 이곳 돈(투그릭, Tugrik)으로 바꾼다. 은행보다 민간 환전소가 환율을 조금 낫게 쳐준다고 해서 시험 삼아 환전을 해 본다. 1달러에 1,882투그릭. 400 달러가 752,840 투그릭이다. 얼마나 이득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지 생활에 필요한 돈이다.

 

▲ 여름철 아파트 숙소가 있던 동네 풍경, 이 길을 따라 시내 볼일을 보곤 했다

 

은행 볼일을 보고 이흐 델구르 수퍼 마켓에서 식품을 구입한 후 방송국으로 간다. 구내식당에서 밥, 슐(양고기, 감자, 당근이 들어간 국), 야채 샐러드, 수테체(버터가 들어간 우유차)를 시켜 점심을 먹는다. 처음 대하는 메뉴이면서 우리 식 식단을 주문한다. 밥과 국, 반찬 그리고 식사 후에 물 대신 마실 수테체를 주문한 것이다.

 

2층 작은 구내식당은 방송국 직원들이 점심을 해결하는 곳으로 뒷 줄에 선 몇 사람이 한국에서 온 내가 주문하는 상황을 지켜보기도 한다. 몽골어를 모르니, 배식하는 몽골 아주머니와 의사소통이 힘든 상황이다. 이상하게 이곳 식당엔 마실 물이 제공되지 않는다.

 

고원지대라 그런지 항상 목마르다. 수퍼 마켓에서 구입한 플라스틱 컵으로 방송국 복도에 비치된 한국산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와 마신다.

 

오후가 되자, 옆 방의 50대 여성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건넨다. 프로젝트 매니저 직함의 그녀는 러시아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아들은 한동대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취직해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과 인연이 있다. 유학생 신분으로, 혹은 자본 중심국인 한국으로 많은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방문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국은 친근한 이웃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에겐 물가가 비싼 일본보다 한국을 친연성이 있는, 배울 것이 많은 나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또 조금 있으니 옆자리 조사팀 리서처의 친구가 찾아 왔다. 리서처는 지금 여름휴가를 가고 없어 내가 그의 말동무가 된다. 찾아온 친구는 외부 프로덕션의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인데 영어가 곧잘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생각이 많은 친구다. 나이도 지긋해 보이면서 체구는 작고, 키는 작달막한데 옹골차게 보인다.

 

▲ 스테이트 빌딩 남향 정면에 자리해 있는 칭기스칸 좌상

 

그는 몽골의 현실을 비판한다. 그의 비판 정신이 마음에 든다. 프로듀서로서 몽골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몽골은 지금 대통령, 국회, 행정부가 서로 독립해 있어 어느 한쪽에서 찬성하면, 다른 한쪽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 정치권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나로선 모를 일이지만, 그는 몽골에서도 한국의 박정희처럼 강력한 대통령의 리더 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몽골 정치 현실에 아쉬움을 나타낸다. 카리스마도 있고 오늘날 한국경제의 초석을 마련한 박정희라는 인물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다양한 뉴스원과 쉽게 접촉하고 한국과 왕래가 잦으니, 발전하는 한국의 과거와 현주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몽골인들이다.

 

▲ 눈 내린 날, 칭기스칸 광장 옆 도로를 걷는 울란바타르 시민들, 2016. 11월

▲ 코리 부리야트(Kori Buryat) 족의 가족, 우리네 모습과 그대로 닮았다

 

나는 그에게 몽골 인구가 너무 적다고 말하자, 그는 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다. 현재 이곳 인구는 300여만, 중국에 속해 있는 내몽골에 600여만, 몽골 북쪽 러시아 지역인 부리야트(Buryat) 공화국에 100여만 명의 몽골인이 있는데 이들이 합치면 1,000만여 명이 돼 이 힘으로 옛 징기스칸 시대처럼 밖으로 나아 간다면 어찌 될까 상상해 보라고 한다.

 

징기스칸 시대에는 기십만의 기마군단으로 세계를 석권했다. 물론 국력이 선진국 수준일 때를 가정해서 소개하는 에피소드이다. 이는 외국의 전문가들이 ‘천만 몽골인’을 화제로 논평하는 농담 섞인 말이라고 하면서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울란바타르의 인구 20만, 50만 시대가 20세기 초였는데 지금 150만 시대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사실 1년 내내 가축을 키우며 초원을 지키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자연과의 투쟁은 넘어야 할 산이기 때문이다.

 

2세 교육, 일자리, 생활의 편의를 위해 쉽게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도시로 모이는 게 요즘 몽골인의 현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은 일찍 결혼해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고 있다. 도시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여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보인다.

 

몽골인의 피는 면면히 흐르고 있다. 비록 지금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지구상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지 모를 일이다.

 

최소한 12,000년 전 베링해협을 건너 러시아 동부의 아시아 대륙 끝에서 미 대륙으로 이동한 북방 몽골로이드 계통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지금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오랜 옛적 2,000만가량의 미 대륙 원주민들이 20세기 들어 100만가량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인종 우열시대를 넘어 무한 적자생존 시대를 살고 있지나 않은지.

 

 

▲ 아리조나 주 국도변 사막의 아침 일출

 

아리조나(Arizona)주 북쪽 프리웨이를 달려 플래그스태프(Flagstaff), 윈슬로우(Winslow)를 지나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달렸다. 그랜드 캐년의 동쪽 나바호(Navajo) 인디언 지역보다 더 깊숙하고 외진 거주지에 다다랐다.

 

미국 땅이지만, 미국이 아닌 곳, 바로 호피 인디언 보호지역(Hopi Native Indian Reservation)이다. 미국 연방법이나 주법보다 ‘호피 법’이 위에 존재하고 그 위에 ‘마을 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아직도 영어가 아닌 자기네 부족 언어인 호피어를 사용한다.

 

1,000년을 이어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어 딸이 없으면 유산을 받을 수 없고 대가 끊긴다고 하니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만큼 무 개방, 무 문명을 고수하고 있단다.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사진을 찍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가장 보수적인 종족이다.(이희숙 수필가의 ‘7월에 만난 인디언 어린이’ 중에서, 미주판 중앙일보 2023. 7. 14일자)

 

▲ 아메리칸 인디언, 이들도 몽골리안이다

 

▲ 모아파(Moapa) 인디언의 4천여 년 전 암각화, 네바다(Nevada)주 불의 계곡(Valley of Fire)

 

▲ 미 대륙 66번 도로(Route 66)의 상징 로고 이 옛길은 동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시작해서 서부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해안까지 연결된 동서 횡단 도로로, 영토확장에 이어 서부개척시대를 대변하는 길이었다.

 

▲ 미 대륙 태평양 연안 크리스탈 코브 (Crystal Cove), 대륙의 끝 지점이면서 태평양 시대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태평양 연안 1번 도로(Pacific Coast Highway)를 따라 아름답고 시원스런 풍경이 펼쳐진다.

 

▲ 미 대륙 서부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금광, 은광이 발견되던 서부개척 시기, 실직과 땅을 잃고 꿈에 부푼 사람들은 ‘66번 도로’를 따라 동부를 출발해 이 사막을 거쳐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현장 옛길이다.

 

1492년 콜롬부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의 무기와 병균 등에 의한 원주민들의 감소는 앞선 문명의 도구를 가진 인간의 지혜와 욕심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 부족들을 절멸시키고 그들이 살던 땅을 조금씩 점령, 관할한 결과가 500여 년 후, 오늘의 미국이다.

 

유럽 문명이 미 대륙의 원형질을 바꾸게 했다. 수렵 채취에 의존하던 인디언 거주 지역을 점령해 이곳에서 먹을거리 종자를 들여와 옥수수, 감자 등 농사를 지었고 말이 없던 미 대륙에 말을 방목해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 프랑스 남부의 농촌풍경, 빈센트 반 고흐 작

 

▲ 아프리카 서해안 주민들, 이들 옛 선조들은 노예 상인들에 의해 미대륙으로 끌려갔다.

 

식물의 작물화와 동물의 가축화가 미 대륙의 원시 자연을 바꾸어 놓았다. 농장을 일구는 중요한 노동력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이 담당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에스키모로 널리 알려진, 북극 지방에 13만 명가량 남아 있다는 이누이트(Inuit) 종족도 몽골리안 아니던가.

 

기원전 3세기, 아시아 중북부 대륙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집단을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흉노(兇奴)라고 명명했다. 지금까지 흉측한 오랑캐로만 인식되어온 흉노가 사실은 아시아 대륙, 넓은 땅의 옛 조상들 이름이다. 몽골어로 ‘사람’을 ‘훈(Hun)’이라고 일컬으니, 중국인들이 이를 음차해서 '흉노'라고 부르고 기록했다는 설이 있다.

 

옛 중국의 동북쪽에 사는 민족을 동북의 오랑캐라고 해서 동호(東胡) 혹은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그 이전에 예맥(濊貊)으로 불린 우리 민족도 이에 속한다. 그렇다면, 옛 중국 땅에 산 한족(漢族)은 그들 나름의 철저한 자기중심,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한족 주변에 사는 민족을 다 같은 사람들인데 볼품없는 이름으로 격하시켜 명명했으니 말이다.

 

이른바 이들의 ‘중화(中華)사상’이 예나 지금이나 고질적으로 중국인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인가. 아직도 우리는 그 이름이 면면히 전해져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쉬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국가전략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옛 실크로드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복심이 아닌가. 서로 이웃해 있는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까지 그들의 테두리 안으로 넣으려는 망상은 또 무엇인가.

 

아시아 대륙 이곳에는, 기원 2세기에서 4세기 동안 이 땅에 선비(鮮卑)라는 나라가 있었고, 4세기에서 6세기 동안은 유연(柔然), 6세기에서 8세기에는 돌궐(突厥, Turk), 8세기에서 9세기 동안은 위구르,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는 거란(契丹)이 있었다고 역사적 사실이 말하고 있다.

 

몽골족은 중국 동북방에 있는 흑룡강 상류 지역에 살았는데(물론 그 이전 바이칼 호수와 몽골 대륙 일대에 널리 퍼져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씨족, 부족 단위의 세력을 이루고 힘을 발휘하면서 9세기에서 10세기경에 지금의 몽골 초원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 게르 안 난방과 취사도구로 쓰이는 난로, 땔감은 나무는 물론 축분을 이용하기도 한다허르헉 요리, 가축의 모든 부위는 몽골인의 소중한 양식이 되고 있다

 

▲ 칭기스칸 광장의 칭기스칸 좌상

 

그 후 몽골족은 징기스칸이 활약한 13세기 초기부터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지금 몽골리안의 역사적 존재 배경이다. 그렇다면 이 고원지대에 여러 민족의 거주와 이동이 있었고, 이들은 결정적 이주 변동의 원인에 의해 생활 무대를 옮겨갔다.

 

이들의 생활 방식이 유목하며 이동 거주가 자유스러운 형태인 까닭에 그들이 옮겨가 사는 곳이 곧 가축을 키우는 일터였고 주거지였다.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을 하면서, 많은 몽골리안이 흑해 연안, 헝가리 들판, 그리고 중동 지역까지 그들의 피를 섞지 않았던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보이는 머리가 검고 우리처럼 보이는 세계인의 조상들의 뿌리를 따져 올라가면, 흥미로운 사실들이 얽혀 있을 것 같다. 나는 몽골 현지에 와서도 간혹 관심을 끄는 사람들의 생김새를 보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상을 해 본다.

 

징기스칸 시대에 주변 지역이나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정복민으로 끌려오거나, 내왕을 했을 터이다. 그런 까닭에 울란바타르 시내나 식당, 회의장에서 틀림없는 몽골리안인데, 어딘가 생김새가 다른 이들을 가끔 발견한다. 피부색이 까무잡잡하고 눈망울이 큰 여성이나 피부가 하얗고 콧대가 오똑해 마치 서구인처럼 보이는 이들도 간혹 보인다. 물론 오늘날 몽골리안의 피가 섞여 있는 채이다.

 

심지어 내가 아는, 눈망울이 큰 한 여성은 이웃 나라인 카자흐스탄에 고향을 두고 있고 그녀의 가족은 회교를 믿는다고 한다. 그러니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몽골리안의 생식적, 유전적 확장과 전파는 인류사와 함께 하는 것이리라. 실은 몽골리안의 혈연으로 따지면 그 숫자는 1,000 만을 넘어 수천만, 수억은 될 것 같다는 추측을 해 본다.

 

▲ 미국 네바다주 모아파 밸리(Moapa Valley) 지도

 

▲ 불의 계곡에 서식하는 큰 뿔 산양(Big Horn Sheep)

 

‘몽골리안 루트’ 측면에서 태고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북방계 몽골리안은 베링해협을 거쳐 알라스카, 북미, 남미 대륙으로 이동, 정착하면서 아메리칸 인디언, 인디오가 되었다. 이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하는 고수레 풍습, 아이들의 실뜨기 놀이와 민속 노래 등이 한국인의 전래 풍습과 가락과도 비슷하다고 한다. 오늘날 고수레 풍습은 몽골 초원의 노마드, 유목민 생활에도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생활풍습이다.

 

언어, 체격, 모습, 생활풍습 등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우린 몽골리안의 동류의식을 느끼곤 한다. 문화는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네트워크임이 확실하다.

 

미국 네바다(Nevada)주에 있는 불의 계곡(Valley of Fire)으로 가는 도중에 모아파 밸리(Moapa Valley) 지명을 보고, 난 우리말 ‘뭐 아파’를 연상해 보았다. 이런 발음을 한 인디언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증거인가, 곰곰이 따져 본 적이 있었다. 아파치(Apachi) 인디언 부족 이름의 어원이 ‘아버지’라는 설 등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파묻혀 있는 곳이 미 대륙 같다.

 

1830년인가, 동부에 정착한 유럽계 이주민들은 미시시피강 동쪽 지역 개척(금 발견)이 급진전 되면서,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제정해 안온한 곳에 뿌리를 내려 살고 있던 미 대륙 동남부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서부 사막지대인 황량한 곳으로 내쫓았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강제이주 도중, 그들이 정붙여 살던 삶터를 떠나 미지의 땅, 오클라호마로 향하는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은 체로키(Cherokee)족의 비극을 상징했다. 심지어 식량원이 되고 있던 들소(buffalo) 사냥을 상당 기간 동안 대규모로 실시, 이들의 양식거리를 고갈시켜 인디언 수를 감소시켰다고 하지 않는가. 유럽 이주민들의 탐욕에 결과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황무지에 버려진 신세의 그들이었다.

 

▲ 울란바타르 시민들, 이들의 표정은 언제나 평화스럽고 활력이 넘친다



▲ 예술대 졸업식이 있던 날, 2016. 6월초몽골의 교육열은 한국보다 더 높은 것 같다.

 

▲ 어린이날 행사에 참가한 울란바타르 소녀들, 2016. 6. 1 칭기스칸 광장

 

담배를 사러 매일 아침 들리는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가게 안. 상점 여주인과 얼굴을 익힌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내가 “미니 네르 금(내 이름은 금입니다)”이라고 최근 배운 간단한 몽골어로 상점 여주인에게 말하자 그녀는 자기 이름은 ‘오귀(Ogui)’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30대 중반의 그녀와 조금씩 친해진다. 몽골어로 의사가 통하면서 서로의 친근감을 확인한다. 그리고 서로 닮은 모습에 인력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모르는 사이일지라도 의사소통이 되고 어딘지 모르지만, 서로 공통분모가 작용하면 지구촌 어디나 다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이성적, 감성적 발로와 배경은 다 같을 수밖에 없다. 내일도 가게 주인 오귀를 만날 것이다. 다 같은 북방계 몽골로이드 계통의 사람들끼리 사이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 지구촌은 세계시민이 사는 곳이라 할만하다.

 

 

Eco-Times 금웅명 고문producerkum@daum.net

[MNB (몽골 국영방송국) 방송 자문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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