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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르포' 마산포 , 대원군이 청(淸)나라로 끌려간 현장 !

-허물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
-정비해서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Eco-Times | 기사입력 2023/11/15 [09:00]

'영상르포' 마산포 , 대원군이 청(淸)나라로 끌려간 현장 !

-허물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
-정비해서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Eco-Times | 입력 : 2023/11/15 [09:00]

 

 

조선조 근세사의 아픔을 간직한 마산포 !

 

▲ 옛 마산포구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많은 상선과 고깃배들이 드나들어 영화를 누렸던 마산포구는 육지화 되고 현재는 서너채의 집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왼편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가면 언덕 아래에 바로 포구가 나온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당시는 먼지 뽀얀 흙길이었을 것이다.  이 길을 따라 대원군이 끌려갔다

 

▲ 한때 호황을 누렷던 횟집들 . 간판은 아직 또렷하지만 현재 폐허가 되어 버려져 있다. 이 일대가 마산포구 였다.

 

▲ 마산포구 현장을 취재하는 박래양 기자

 

청의 북양함대가 드나들었던 옛 포구가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농경지로 변해 있다. 포구로 나 있는 어섬길 가에 서 있던 회집 등 몇 채의 폐건물이 이곳이 포구였음을 말하고 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서해안 이곳 해역은 외세의 바람이 물밀 듯이 불어온 역사의 현장이다. 1882년 7월 청나라 북양함대 군함이 들어와 이곳 마산포에 정박해 있었고 대원군을 납치하다시피 군함에 태워 텐진으로 압송해 간 포구이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은 민비 인척의 부정 부패로 인해 민란이 일어났고 이때 대원군은 난병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난병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잡아 처단했다. 민씨 척족인 민겸호는 대원군에게 구명했으나 거절당했다. 민영익은 삭발하고 승려처럼 변장해 한양을 빠져나갔다.

 

고종은 난병이 궁궐로 들어오자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고 대원군은 고종 친정 이후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군제개혁을 단행하고 민씨 척족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맏아들인 이재면을 선혜청 당상에 임명해 병권과 재정 양권을 장악하게 했다.

 

민비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정권을 되찾기 위해 몰래 청나라와 접촉해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결국 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 마산포에 정박한 군함에 태워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가 1882년 7월이었다. 그는 3년간 연금 생활을 한 이후 1885년 8월에 돌아왔다. 이는 개인사를 넘어 슬픈 조선 근세사의 한 단면이었다.

 

▲ 흥선 대원군 이하응

 

▲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하룻 밤 유숙한 최씨 종가 집대문  (경기도 화성시 마산포길 6-4)

 

▲ 허물어져 가는 최씨 종가집/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가슴아픈  역사이지만 이렇게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 과거를 교훈으로 삼고 자주와 국가의 존엄성을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화성시청은 이런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생생한 교육의 현장으로 정비해야 한다.

 

▲ 집 내부 모습 /화성시 문화관계 공무원들은 한 번쯤은 이곳에 방문해서 현황을 살펴 보아야 한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은 수습됐고 청의 이홍장은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내정, 외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해 이른바 종주권을강화했다.

 

▲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

 

한양에 주둔한 청군의 만행은 약탈을 넘어 인신매매에 이르기까지 도를 넘고 있었다. 장안에 걸식하던 어린이들을 붙잡아 중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들은 조선을 속방으로 여겨 이홍장의 수하 오장경을 군문제독이라는 이름으로 한양에 주둔하게 했다.

 

▲ '너섬길 위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러기떼'

 

▲ 덕수궁 중화전,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쌍용 목각상

 

▲ 개화파의 주역들

 

대원군 납치사건이 있고 2년 후 1884년 자주독립의 필요성과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를 보다 못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젊은 엘리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으나, 이 거사 역시 청의 진압으로 끝이 나고 이들은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봉건적 전제군주제도를 폐하고 구미의 입헌정치 제도를 따라 3권분립의 의회제도를 꿈꿨다. 이들의 요구사항 가운데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을 천명하는 혁신정강 14 개조를 공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1,500명 청군의 무력 앞에 개화파의 개혁의지는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생태환경뉴스 Eco-Times / 홈페이지: eenews.kr

Eco-Times 기획: 금웅명 고문.

               취재:박래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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