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품에 안긴 들다람쥐’ ]
조형물 세민스키 고개를 넘어 시베리아 잣나무 숲이 빼곡한 계곡 을 끼고 한참을 달린 우리 차가 비포장도로에 진입했다. 전혀 못 보던 세상이다. 길 양옆으로 광활한 카라콜스크 분지의 스 텝이 펼쳐졌다.
내 정신은 온통 초원에 팔려있었다. 들꽃이 만개한 가운데 이따금 외로운 새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알 수 없는 신비감이 밀려왔다. 우츠-엔 메크 자연공원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가이드를 따라갔다. 야생화와 나지막한 들풀 사이를 헤치며 초원을 걸어가니 홀로 선 커다란 나무 옆으로 돌 더미가 널려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다가가니 유적을 발굴한 커다란 돌무덤이 움푹 파인 장소 였다. 이 지역은 청동기 시대에 거주하던 튀르크족과 스키티아인들의 쿠르간이 곳곳에 있는 고고학 유적지였다.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니, 나지막한 돌들이 이열종대로 꾸불꾸불 서 있다. 고대인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 돌들을 세웠는지는 고고학 자들이 아직도 규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여럿이 함 께 걸으면 안 되고,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걸어가야 영 험한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나도 일리야와 율리야를 따라서 했다. 두 팔을 약간 들어 올린 편한 자세로 마지막 돌이 있는 곳까지 갔더니, 작은 새 한 마리가 돌 위에서 꽁지를 흔들며 지저귄다. 사람을 만나 반가웠는지, 아 니면 전혀 못 보던 얼굴의 인간이 나타나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가 싶었다.
모든 걸 잊고 걷는 동안 정말 신통한 기운이 들어왔는지 마음이 한없이 평화롭고 몸도 가벼웠다. 앞서가던 일리야가 걸음을 멈추고 내게 손짓했다. 몸을 구부려 하얀 꽃을 가리키며 에델바이스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에델바이스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표정이 상기된 나에게 일리야가 여린 풀잎 한 줄기를 내밀었다. 옅은 쑥 향기가 났다.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쑥 향이 그윽했다. 알타이 자연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것 같았다.
그날 마지막 일정은 암각화 유적지로 유명한 구릉에 오르는 일이었다. 땡볕이 강해서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다녀올 심산이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율리야가 어쩌면 여기서 들다람쥐(suslik)들을 볼 수도 있다고 언급했는데, 초원의 쑥을 아직도 코끝 가까이 대고 있던 나는 다람쥐 얘기는 건성으로 넘겼다.
영문을 모르고 나지막한 바위 구릉에 올랐다. 사방으 로 시야가 탁 트였다. 드넓은 카라콜스크 분지는 정말 평화로 웠다. 뭉게구름 핀 하늘 아래 저 멀리로는 어깨동무를 한 알타이의 높은 봉우리들이 평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저 만치에 조형물이 하나 서 있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깡마른 소년이 두 손으로 들다람쥐를 살포시 안고 있는 좌상이다. 방문자들 사이에 ‘소년과 들다람쥐’로 불리는 이 동상이 세워진 유래는 이렇다. 2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와 형제들이 전쟁터로 떠나자, 가족의 생계를 맡는 일은 고향 집에 남은 어린 사내아이들 몫 이 되었다고 한다.
추위와 기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올가미를 놓아 들다람쥐를 잡았고, 스텝 지대에 서식하는 이 작은 동물의 희생 덕분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맨발의 소년은 알 타이 전통 모피를 왼쪽 어깨 위로 걸친 자세로 들다람쥐를 안고 있었고,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전쟁터로 떠난 가족들이 언제나 돌아오려나 학수고대하며 이 구릉에 올라 카라콜스크 분지로 들어오는 시골길 초입 쪽 을 바라보곤 했다는 것이다. 오목 거울 형태로 파인 ‘얼굴 없는 얼굴’은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 고향에 남아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아이들, 그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의 모습을 비춰주는 하나의 상징일터이다.
지역 주민들이 모금 운동을 주도하고, 톰스크 출신 젊은 조각가가 제작했다는 이 조형물에서 몇 걸음을 물러나 바라본 카라콜스크 분지의 장엄한 파노라마는 80여 년 전의 참혹한 비극을 회상하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신화의 땅을 떠나며]
시베리아 남서부 천혜의 자연을 품은 알타이는 신화와 전설의 땅이다. 여행 기간 중 차량이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때마다 율리야는 마이크 볼륨을 올리고 방문 예정지와 관련된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중에는 시작만 들어도 대충 줄거리가 어떤 결말로 끝날지 짐작되는 이야기였지만, 원시적 힘이 느껴지는 알타이 땅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묘미는 색다르다.
몽골어로 ‘황금’을 의미하는 ‘알탄’, 그리고 튀르크어로 ‘높은 바위산’을 뜻하는 알타이 탄생 신화 얘기를 들어보자. 어느 날 신께서 지상에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황금빛 땅’을 세우기로 하고, 사슴, 매, 잣나무 셋을 불러 모아 각자 가장 좋은 장소를 찾아보라는 임무를 맡겼다.
땅 위를 달린 사슴, 하늘 높이 날아오른 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잣나무 이 셋이 함께 만난 곳에서 ‘황금빛 땅’ 알타이가 생겨났다. 지상과 하늘, 지하의 세 공간을 아우르는 성스러운 존재인 자작나무를 대하는 알타이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맞닿아 있는 신화다.
샤먼이 신내림을 받는 장소도 자작나무 숲 근처였고, 또 샤먼은 이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통해 하늘의 정신세계와 소통을 하고, 줄기와 뿌리를 따라 지하의 세계와도 만난다고 하지 않는가. 신성한 나무에 매는 샤머니즘 전통의 리본도 흰색은 맑은 마음을, 노란색은 땅을, 푸른색은 하늘을 각각 의미한다고 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일정은 알타이변강주 지역으로 이동해서 홀모고리에 수목원을 방문한 다음 공항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시베리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식물원이라고 하기에 기대를 잔뜩 했는데, 와보니 작은 규모의 사설 휴양 단지였다.
물놀이 공원 같은 곳에서 꼬맹이 몇 명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고, 완만한 구릉 경사면을 따라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단정하게 서 있는 그저 그런 곳이었다. 햇빛도 쨍쨍 내리비쳐서 일행 중 몇 명은 구경을 마다하고 일찌감치 그늘 밑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잠깐이라도 수목원을 둘러 보자는 생각으로 나와 또 다른 일행이 해설사를 따라나섰다.
찬찬히 들어보니 수목원의 형성 과정이 흥미로웠다. 얘긴즉슨, 톰스크대학교 전문가 팀이 알타이산 약초들을 대량으로 재배 해서 상품화할 목적으로 극동을 비롯한 수많은 후보지를 탐사 한 끝에, 홀로고리에의 미기후가 이 식물들이 자라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근 농업인들과 공동으로 사업 모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신화의 땅에 현대식 약초 재배 단지와 건강 보조식품 생산 공장을 세운 실화이다
단지 내 상품 전시실에 들어가 물건들을 둘러보던 나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작년 10월 러시아 작가 초청 행사 때 서울에서 제작했던 팸플릿 표지 삽화의 분위기와 너무나 똑같았다.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이지연 교수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독특한 신화적 소재의 작품이었는데, 알타이 화가의 작품이라고 했었다.
알타이로 출발하기 전 문득 그 삽화 생각이 떠올라 소책자 표지 뒷면에 적힌 작가 이름을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던 터였다. 타라카이라는 예명의 이 화가 작품을 홀모고리에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보육원 출신의 이 방랑 철학자(지금은 결혼해서 정착했다고 한다)는 아주 가느다란 선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해서 고대 알타이의 신화시대를 화폭에 재현하는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힘을 지닌 ‘자연의 어머니’ 형상을 중심으로, 산과 강, 나무와 풀, 물고기와 사슴, 알타이인의 삶과 풍속 등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하나로 어우러진 자유로운 세상을 그리는 작가다. 싱겁게 끝날 것 같았던 알타이에서의 마지막 날은 니콜라이 체포코프의 그림들을 만나는 행운을 선사하며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 화가가 가끔 홀모고리에 식물원을 찾기도 한다는 얘기에 귀가 잠시 솔깃했지만, 벌써 인근 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시간이었다. 알타이변강주 산하의 알타이스키 지역 중심지 알타이스코예. 포장도로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이 움푹움푹한 한적한 마을 알타이스코예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주 단출한 곳이었는데,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 만든 샐러드와 밋밋한 우하(생선 수프), 주요리로 나온 쑥색의 펠메니 등 깔끔한 건강 식단이 인상적이었다. 알타이에 정착한 러시아 구교도들의 음식이라고 했다.
17세기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먼 시베리아로 이주한 구교도들은 유럽식 문명을 활용해서 알타이 고산지대의 농업, 축산, 사슴 사육, 양봉, 잣 열매 수확 등에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상거래는 물론, 중국과의 녹용 거래 등의 물꼬를 튼 것도 바로 구교도들이었다는 유익한 정보도 그곳에서 식사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도중에 율리야는 이틀 후 떠날 트레킹 준비로 바쁘다며 차에서 내렸고, 공항 휴게실에 도착한 우리 는 알타이산 차를 한 잔씩 주문해 마신 다음 노보시비르스크 행 비행기에 올랐다. 서울에 도착해서 무더위와 씨름하느라 알타이 기억이 어느새 흐릿해지던 어느 날 왓츠앱으로 짧은 문구와 함께 사진 몇 장이 들어왔다.
알타이의 최고봉 벨루하 아래쪽을 통과 중인 율리야가 보낸 메시지였다. 신성한 봉우 리여서 알타이인들이 접근을 꺼렸다는 이 산봉우리 아래로 자그마한 정교회 예배당이 서 있다. 나도 언젠가 거기에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가는 길에 카라콜스크 초원에 멈추어 그 향기로웠던 쑥 내음을 다시 맡아볼 수 있으려나
생태환경뉴스 Eco-Times / 홈페이지: eenews.kr 김현택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명예교수
<저작권자 ⓒ 생태환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